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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숲으로 돌아온 표범
채희철(작가)


한국 표범 잔혹사

아무르 표범(Panthera pardus orientalis)의 서식지는 한반도, 러시아, 만주 등 극동지역이다. 한때 아무르 표범은 ‘한국 표범’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에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사람에게 위해를 끼치는 해수(害獸)를 사냥한다는 미명 하에 한국 표범을 집중적으로 학살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무장을 극도로 경계했지만, 한국 표범을 학살하는 목적이라면 조선인에게 총과 탄약을 기꺼이 내주었다. 조선인은 그 총을 들고 모피를 얻기 위해 백두대간을 누비고 다녔다. 한국 표범을 학살하는데 있어서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따로 없었던 셈이다. 일제시대의 공식적인 한국 표범의 살상 개체수는 624마리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밀렵까지 합한다면 천여 마리 이상의 한국 표범이 살상된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 표범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절멸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1960~70년대에도 한국 표범 학살 기록은 간헐적으로 계속된다. 공식적으로는 1962년 경남 합천 오도산에서 포획되어 창경궁에서 머물다 1974년에 죽은 표범이 한국의 마지막 표범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한국 표범의 멸종을 공식적으로는 선언하지 않고 있다. 현재 아무르 표범은 지구상에 단 50여 마리만이 생존해 있다.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 부근에 서식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그곳을 국립공원 ‘표범의 숲’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숲에서 불법으로 벌목된 나무가 중국으로 넘어가 값싼 가구로 가공된다. 세계 각지로 수출되는 가구가 아무르 표범의 서식지인 숲을 꾸준히 침식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 표범의 역사는 자연계에서 어떤 종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인간 중심주의 시각이 갖는 위선을 폭로한다. 인간은 멸종을 ‘환경변화의 부적응’에서 찾고자 한다. 하지만 대부분 종의 멸절은 사실은 자연사가 아니다. 인간 제국의 총을 앞세운 학살, 서식지 침탈이었다는 것을 한국 표범이 증언하고 있다.

작은 표범과의 도시전쟁

세계 각지에서 표범은 멸종위기 동물로 지정되고 있다. 식량 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기 때문에 표범을 사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의 몸을 가죽으로 감쌀 목적으로만 밀렵되고 있다. 표범의 서식지인 숲도 개발을 목적으로 꾸준히 파괴되었다. 표범은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 위에 인간은 안심하고 도시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표범과 한 핏줄인 동물 즉, 고양이를 도시에서 또 다시 밀어내려 하고 있다. 불결하다, 쓰레기통을 뒤진다, 시끄럽게 운다 등을 이유로 길고양이를 몰아낸다. 고양이 개체 수가 많아지면 동네 집값 떨어지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양이에게 이 도시는 인간만의 소유가 아니다. 고양이에게 도시는 자연의 일부이며, 그 자연에 고양이 자신의 몫이 있다고 느낀다. 땅의 소유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계약이지 고양이와 인간이 맺은 계약이 아니다. 고양이에게는 인간 또한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자연 속 하나의 개체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에게 담장은 사적 소유의 영역을 표시함으로써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분리시켜내는 건축물이지만 고양이에게 담장은 그저 길이다. 인간은 화려하고 깨끗하며 질서를 갖춘 인공적 이미지들로 도시를 완벽하게 포장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포장된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고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존재들은 항상 있어왔다. 지금 길고양이가 바로 그런 존재다. 고양이과 동물들은 인간이 부른다고 오지 않고, 가란다고 가지 않는다. 인간만 ‘격’이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자연에도 고유의 품격이 있다. 고양이과 동물은 자기 자신의 주인은 그 자신이며 모든 자연은 동등하다는 평등과 공존의 기본적 정의를 확고하게 갖고 있다. 고양이는 단지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괴롭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작은 표범의 외침이다.

 

‘공존’의 시작

공존의 시작은 공유의 감각에서 시작된다. 공유의 감각이란 소유에 대한 자기 제한 즉, 자기 한계에 대한 감각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자신의 지배욕과 소유욕에 대해 스스로 제한을 둘 필요가 있다. 자연이라는 무대에는 인간만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숲이 살아있고 그 속에 표범이 살아있던 시절, 인간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졌다. 표범은 인간에게 힘의 한계를 알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런 두려움과 한계 설정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혜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을 용기라 칭찬하고, 어떤 것과도 맞서 싸워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고취는 오히려 인간을 망쳐 지구를 파국으로 이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숲을 되살리고, 표범을 되돌아오게 하자. 우리 자신의 교만함을 버리고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도록. 우리가 자연을 두려워하도록.